'탑건' 시리즈와 '배트맨 포에버'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할리우드 배우 발 킬머가 사망한 지 1년 만에 인공지능(AI)으로 다시 관객과 만난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킬머는 생전 출연 계약한 독립영화 '무덤만큼 깊은'(As Deep as the Grave)에 생성형 AI로 출연할 계획이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 미국 남서부에서 유적을 발굴하던 고고학자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킬머는 지난 2020년 가톨릭 사제이자 아메리카 원주민 영성주의자인 핀탄 신부 역으로 캐스팅됐지만 병세가 악화해 실제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영화 각본가이자 감독인 코에르테 보어히스는 “핀탄 신부 역할로 정말 빌 킬머를 원했다. 영화는 전적으로 그를 중심으로 구상됐다. 그의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과 미국 남서부 지역에 대한 애정, 유대감을 바탕으로 구성된 영화였다”며 “촬영 준비를 마쳤지만 그는 심각한 건강 문제로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킬머가 생전 직접 촬영한 장면은 없지만, 제작사는 유족의 협조를 통해 생성형 AI로 그의 모습을 재현하기로 했다.
보어히스 감독은 “발의 가족들은 그가 정말로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고 이야기했다”며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AI로 그를 구현하는 일이 발이 원했던 작업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킬머의 젊은 시절 모습은 유족이 제공한 사진을 바탕으로 구현됐으며, 중년이 된 모습은 수술로 인해 탁해진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사용했다.
영화 제작자인 존 보어히스는 “핀탄 신부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도 결핵을 앓았다. 후두암 투병 당시 발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낸다면 배우와 역할의 특별한 연결고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처음부터 킬머를 AI로 구현할 생각은 아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제작이 중단, 예산과 시간 제약 등 여러 우여곡절로 재촬영이 불가능해 핀탄 신부 캐릭터를 아예 삭제한 채 개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빼고는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아 생성형 AI를 고심했다고 한다.
보어히스 감독은 “보통 같으면 배우를 교체했을 것이다. 저는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영화에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 많다. 하지만 예산도 부족하고, 대형 스튜디오 영화도 아니라 다시 촬영할 수 없었다”며 “그러다 필요한 기술이 이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창작업계에서 AI 사용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다만 보어히스 형제는 이번 영화를 통해 AI가 윤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사례를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미국 배우 조합(SAG)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한편, 출연료는 유족에게 지급했다고 덧붙였다.
킬머의 딸 메르세데스 킬머는 성명을 통해 “영화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아버지는 생전 그가 거주했던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며 “또한 아버지는 새로운 기술을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넓히는 도구로, 또 매우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영화 '탑건'(1986)에서 '아이스맨' 역할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킬머는 후두암 투병 중에도 후속편 '탑건: 매버릭'(2022)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는 후두암 후유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AI로 목소리를 재현해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이후 3년만인 2025년, 6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