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전후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현재 선진국 지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동력이 된 것은 '과학기술'과 '인재'였다. 처음에는 해외 과학기술 인재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에 유치했고, 이후 과학기술 인재들을 직접 양성해 산업 기반을 이루고 성과를 쏟아냈다.
호시절은 영원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우리 과학기술 인재들의 '낮은 연구 생산성'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중국이 과거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인재를 무기로 득세하는 것을 지켜보는 상황이다. 인구 문제, 이공계 인력 부족 문제도 대두됐다. 독일, 중국 등 과기 인재 양성 선진국에서 한국의 상황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이런 둔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교수 출신이면서 국내 대표 과학기술 학술단체, 인재육성 핵심 기관을 이끄는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정우성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을 찾았다.
이들로부터 독일·중국 사례 중심의 과학기술 인재양성 의견을 들어봤다.
◇인재 순환은 과학기술 생태계 '확장'
정진호 원장과 정우성 이사장은 독일 과학기술 인재 양성이 대학-연구기관-기업의 '순환 구조'로 연계·작동하는 것에 주목하며, 이를 우리가 본받았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먼저 정 원장은 이에 대해 “우리는 연구자가 기업으로 이동하면 '인재 유출'로 인식하는 반면, 독일은 '순환'이 곧 네트워크 자산이 되고 생태계가 확장한다고 여긴다”라고 강조했다.
인재의 이동·순환이 연구개발(R&D) 활성화를 부른다는 견해도 밝혔다. 그는 “기초연구-응용연구-전략연구의 세 부분이 서로 교류하면서, 기초연구가 응용·전략으로 확장하거나 반대로 산업 현장에서 제기된 문제 의식이 기초연구 질문으로 환원하기도 한다”라며 “영역을 오가는 '유연성'을 보장하는 것이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고 피력했다.
인재 이동 장려 '구조'가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학·출연연·기업 간 연구 역량 격차가 크지 않도록 유지하고, 이동 시에도 개인 경력 손실이 없도록 연봉·연구 자율성·재진입 기회가 보장된다면 유기적인 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정우성 이사장 역시 독일의 대학-연구기관-기업 간 순환과 연계, 이에 따른 생태계 확장을 받아들여야 할 점으로 인식했다.
그는 특히 프라운호퍼, 막스플랑크 등 연구협회 연구진이 현지 대학 교수를 겸하는 구조를 강조했다.
정 이사장은 “중국도 그렇지만, 독일은 우리나라에 비해 학생 대비 교수 수가 많고, 이는 연구협회 소속 연구자들이 지역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역할도 함께하기 때문”라며 “교육 인프라 '사이즈'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구 분야 생태계 확장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정 이사장은 이런 교육 구조에 기업까지 더해진 과학기술 산학연 클러스터가 독일 전역에 자리잡은 것도 주목했다. 독일에는 프라운호퍼, 막스플랑크의 지역별 조직을 거점으로 이뤄진 클러스터들이 전국의 과학기술 역량을 상향 평준화하고, 지역별로 균등한 연구 경험 기회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는 “메르세데스 벤츠는 굳이 수도나 다른 지역이 아닌 자신들이 입지한 슈투트가르트에서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고 지역 학생들에게 연구 경험을 주고 있고, 다른 독일 내 기업도 마찬가지”라며 “이는 지역별 고른 과학기술 인재 양성의 핵심이고, 서울만을 외치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과학기술 인재에 대한 또 다른 의견도 있었다. 정진호 원장은 독일이 연구자의 '생애 전환 지점'을 겨냥·투자하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피력했다. 교수 임용 등 연구자가 포스트닥터 과정에서 독립 연구자로 도약하는 시기가 이런 생애 전환 지점인데, 이때를 간과해 당사자들이 불안감을 느끼면 해외로 이동하거나, 산업 진입을 주저하거나, 아예 연구 현장을 떠나는 '이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 원장은 이런 이탈 방지가 과학기술 인재 문제 해소에 큰 부분이라며, 그 완충 장치로 △출연연-기업 공동 채용형 포닥 트랙 △일정 기간 정부에서 인건비를 매칭하는 브릿지 펀딩 방식 △기업 연구소 내 박사급 장기 연구 트랙 제도화 등을 제시했다.
◇과학자 장기 존중 필요...교육 강화도 절실
정진호 원장은 과학기술 분야가 매력적인 선택지로 자리매김한 중국을 살펴 우리에게 적용할 것을 찾자는 견해다. 과학자가 사회적 상승 경로 중심에 위치하도록 만드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우리나라는 정책 결정 과정과 사회적 담론 형성 구조에서 과학자 참여·영향력이 충분히 제도화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라며 “전문직과 비교해 매력도가 낮아, 최상위권 학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기술 분야가 다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 위한 세가지 조건'으로 △경제적 보상 체계의 실질적 개선 △실패 이후에도 재도전이 가능한 경력 구조 설계 △과학자의 사회적 위상 회복을 제시했다.
정 원장은 “중국처럼 과학자가 장기적으로 존중받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형성될 때 인재 구조가 정상화될 수 있다”라며 “과학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부도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우성 이사장은 이공계 교육 자체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이공계 조기 교육이 활성화돼 있는데, 우리도 중고등학교의 과학실험실 인프라 확대, 과학실험 수업 강화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정 이사장은 “단적으로 동물 보호 때문에 예전에 하던 개구리 해부를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물론 동물 보호는 중요한 가치지만, 과학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반영해 해당 수업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는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밝혔다.
중국 대학이 기초과학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도 주목했다. 우리나라는 기초학문 분야 학과가 통합되거나 사라지는 일이 빈번해 전체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장애가 된다고 진단했다.
정 이사장은 이에 대해 “국립대는 그나마 기초과학 관련 학과가 유지되지만, 사립대에서는 취업과 연관성이 깊은 응용학문에 밀려 많이 사라지는 것이 현실로, 창의재단에서도 대학 내 기초학문 역량 강화를 지원하는 사업을 준비할 정도”라며 “대학의 기초과학 학문이 탄탄할 때 나라 전반의 인재 양성도 힘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폐쇄적 엘리트 주의는 경계해야
독일, 중국의 과학기술 인재양성 정책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특히 정진호 원장은 중국의 '엘리트 집중 육성 모델'을 경계했다. 단기간 경쟁력 확보에 효과적일 수 있지만, '폐쇄적 엘리트주의'로 고착될 경우, 연구 생태계 다양성·저변이 약화된다는 우려다.
정 원장은 “중국 모델은 '성과 중심 집중 전략'이라는 강점과 '생태계 다양성 약화'라는 잠재적 한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라며 “전략기술 분야 탁월한 인재에 대한 집중 지원은 불가피하지만, 지방·여성·차세대 연구자를 포함한 넓은 연구 기반과 다층적 인재 구조를 병행해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