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이곳 주차타워에는 500여개의 조명등이 설치돼 있다. 겉으로는 평범한 발광다이오드(LED)처럼 보이지만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해가 뜨고 지며 달라지는 시간과 채광에 따라, 밝고 어두운 공간에 맞춰 조명이 자동 조절된다.
복잡한 유·무선 통신과 연결돼서가 아니다. 공유기 같은 게이트웨이 하나로 500여개의 조명이 단번에 제어된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메시(Mesh) 네트워크'가 뒷받침해서다. 삼성은 주차타워 조명을 메시 네트워크 기반으로 바꿨더니 기존보다 에너지를 절반 이상(57%) 절감하는 효과를 봤다.
◇조명을 만난 '꿈의 통신'
메시 네트워크 기술이 국내 꽃을 피우고 있다. 수백, 수천개의 조명을 제어하며 에너지를 절감하는 인프라로 활용되면서 관련 기업과 시장이 꿈틀대고 있다.
메시 네트워크는 중앙 기지국이나 유·무선 인터넷망에 의존하지 않고, 개별 기기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통신망을 구축하는 기술이다. 그물망처럼 음영 지역 없이 촘촘한 연결을 구현한다고 해 '메시'라는 이름과 함께 '꿈의 통신'이란 별칭을 얻었다.
메시 네트워크는 중앙집중형 통신에서 탈피, 사건이나 사고에 안전한 네트워크망 구축을 위한 개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수백, 수천개의 기기를 연결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 이동통신은 비싸고, 와이파이, 지그비, 블루투스 등은 잘 끊긴다. 또 기기 숫자가 늘어날수록 속도가 느려지거나 접속이 불안정해진다.
이를 극복한 기술이 국내 등장하면서 '개화'했다. 특히 조명과의 융합, 에너지 절감 솔루션으로 거듭나며 날개 단 듯 비상하고 있다. 네트워크로 조명이 연결돼 있다보니 개별 또는 그룹별로 제어가 가능해 에너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삼성은 주차동에 이어 사무동에도 메시 네트워크 조명을 확대·적용했고, CJ대한통운과 GS네트웍스가 물류센터에 적용했다. LS그룹 핵심 전력기기 업체인 LS일렉트릭도 제조 공장에 메시 네트워크 조명을 쓰기로 했다.
◇ 원천 기술 개발 '메를로랩'
삼성, CJ, GS, LS 등 굵직한 기업들을 움직이게 만든 배경에는 혁신 기술이 있지만 이를 구현한 건 국내 한 벤처 기업이다. 2012년 설립된 메를로랩은 독자적인 무선 네트워크 핵심 원천 기술을 통해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그물망의 촘촘함과 안정성에서 차이를 만들었다. 지그비나 블루투스로도 기기간 네트워크를 구현한다.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결정적 차별점이 있다. 지그비, 블루투스가 하나의 네트워크(또는 허브 1개)당 수개~수십여개를 연결하는 반면 메를로랩은 최대 2000개를 연결했다. 이는 망 구축에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고, 안정성도 뛰어나다는 뜻이다.
메를로랩 기술은 삼성전자, CJ대한통운 등에 도입되며 입소문을 탔다. 기술력, 성능, 효과가 국내 굴지의 기업들에 의해 검증된 셈이다.
지난해 50억원 정도였던 회사 매출은 올해 100억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40여개이던 프로젝트는 올해 120여개로 급증했다.
메를로랩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최원재 부사장은 “메시 네트워크 기술을 통해 에너지 효율화 솔루션 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며 대기업들의 주문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메시 네트워크, IoT를 넘어 피지컬 AI로
메를로랩 사례와 메시 네트워크에 관심이 쏠리는 건 발전 가능성 때문이다. 특히 피지컬 인공지능(AI) 시대를 구현할 인프라로 메시 네트워크가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피지컬 AI를 작동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센터 못지않은 컴퓨팅 파워가 있어야 하고 통신도 갖춰져야 한다. 그래야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또는 스마트 팩토리 장비들이 상호 작용하며 유기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로봇, 설비, 센서 등 기기들이 연결돼야 피지컬 AI가 작동한다.
신소봉 메를로랩 대표(CEO)는 “수천개의 디바이스가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메시 네트워크는 기존 통신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대역폭과 속도 면에서는 아직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 있지만 스마트빌딩, 로봇, 드론, 자율주행 등 물리적 AI 디바이스들이 서로 실시간으로 통신하고 협력하는 환경을 구현하는데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니 인터뷰: 신소봉 메를로랩 대표〉
- 상용화 과정에서의 난관은 무엇이었나
▲경쟁 기술과 비교 검증이 힘들었다. 메시 네트워크 기술 자체는 일찍 개발했는데, 경쟁 기술의 시장 보급이 더디다보니 비교할 필드 데이터가 없었다. 다행히 2년 전부터 국내 대기업 고객사들을 만나면서 기술 우위를 인정받게 됐고 더 자신 있게 상용화를 추진했다.
- 통신이 핵심인데, 조명까지 한 이유는
▲진정한 스마트 빌딩 시대가 열리면 조명이 반드시 핵심 기기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조명은 사람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나 있는 기기이고, 수가 많으며, 표준화가 된 형태로 전원이 공급된다. 이는 통신 기술자들이 보기에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가장 효율적인 사물이다. 조명을 장악하는 기업이 결국 스마트 빌딩의 네트워크를 장악할 것이고, 향후 한축을 잡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 회사의 중장기 목표는
▲메를로랩이 바라보는 스마트 빌딩의 미래는 AI와 결합된 '건물 피지컬 AI'다. 메를로랩의 메시 네트워크를 건물의 신경망으로 활용해 건물 내 다양한 사물을 연결하고, AI를 통해 이를 학습·제어하는 피지컬 AI를 만들어 인간의 개입 없이 건물 스스로 에너지·보안·환경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최적화하는 'FSBM(Full-Self-Building Management)' 서비스로 진화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