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인공지능(AI)이 '보조'를 넘어 '독자 판독'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의사가 놓칠 수 있는 병변을 화면에 표시해주던 조력자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영상 분석과 판독문 작성을 수행하고 응급 환자까지 분류하는 주체로 진화하면서 진단 체계 전반의 구조 변화가 본격화됐다.
의료AI 기업 루닛은 독자 판독 기반 자율형 AI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 같은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기존 판독 보조 솔루션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다진 데 이어 '자율형 AI'와 '의과학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로 AI가 스스로 판독을 수행하는 새로운 의료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루닛은 지난 2024년 북미영상의학회(RSNA 2024)에서 자율형 AI 기반의 흉부 엑스레이 판독문 자동 생성기 시제품을 공개하며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솔루션은 AI가 영상을 분석한 후 병변 위치 측정값과 중증도 등 핵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판독 보고서를 직접 생성한다. 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판독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완성한 보고서를 의사가 최종 승인하는 구조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이는 의료기관 운영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반복적이고 대량으로 발생하는 정상 판독 영역은 AI가 처리하고 전문의는 고위험 환자와 복합 질환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재편할 수 있게 돼 진단 속도와 운영 효율을 동시에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닛은 독자 판독 기술을 뒷받침할 기반으로 의과학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하는 'AI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서 의과학 분야 주관기관으로 선정돼 산·학·연·병 23개 기관이 참여한 컨소시엄을 이끌고 있다.
루닛 컨소시엄은 1단계 실증에서 약물 이상반응(ADR) 분석과 응급실 환자 분류 등 실제 의료 환경에서 활용 가능성을 확인했다. 현재는 전국 단위 확산 단계에 진입해 9개 주요 의료기관과 제약사로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루닛은 이를 기반으로 세계 의료 인프라를 지탱하는 '의료용 표준 운용체계(OS)'를 완성하겠다는 목표다.
루닛이 자율형 AI와 파운데이션 모델에 집중하는 궁극적 이유는 의료 접근성 보편화에 있다. 전문의 부족이 심각한 개발도상국과 의료 취약 지역에서 AI가 수준 높은 진단을 제공하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24시간 일관된 정확도로 진단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응급실이나 야간 진료 현장에서의 활용 가치가 높다.
루닛이 아프리카와 중남미 지역에서 추진하고 있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단순 제품 공급이 아니라 자율형 AI 기반 검진 체계 자체를 이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파운데이션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각 지역·의료기관별 특성에 맞는 맞춤형 진료가 가능해져 실질적인 의료 불평등 해소로 이어진다.
루닛은 대규모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상당 부분을 차세대 AI 솔루션 연구개발에 투입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 AI 모델이 의료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의료진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진단의 손길을 뻗는 것이 목표다.
서범석 루닛 대표는 “자율형 AI는 인류가 직면한 의료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핵심 수단”이라며 “추진 중인 증자가 마무리되면 글로벌 기술 경쟁력을 한 차원 더 강화하고 세계 의료 소외계층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